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대학입시 방식으로 논술시험의 원조격이다. "욕망은 무한한 것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철학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으로 오랜 역사와 수준 높은 문제로 이름이 높다. 바칼로레아는 단순히 보면 어렵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현실에서 한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를 제시한다. 우리 입시제도에 바칼로레아가 던지는 시사점은 없을까? 우리의 입시를 살펴보면 그 핵심은 뭐라 해도 자기주도학습과 수학능력 향상 그리고 사고력의 고양에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학생부가 강화되면서 세부특기사항과 창의체험활동, 그리고 각 과목별로 진행되는 수행평가 등이 중요해진 것이다. 'TODAY 바칼로레아' 는 프랑스 시민들이 사랑하는 철학적 사유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입시를 앞둔 수험생에게도 힘이 될 수 있는 컨텐츠라 할 수 있다.

1637년 2월 24일 삼전도의 굴욕

최고관리자 0 529 03.07 22:32

삼전도의 굴욕
1637년 인조15년 병자호란 발발 45일만에 국왕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고  그동안 항전을 해 왔던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했다. 국왕은 곤룡포 대신 평민이 입는 남색옷을 입고 세자를 비롯한 대신들과 함께 청태종의 수항단이 마련되어 있는 잠실나루 부근 삼전도에 도착, 어가에서 내려 2만명의 적병이 도열하고 있는 사이를 걸어 황제를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라는 치욕적인 항복례를 실시하였다.

청은 지난 1636 126일 청태종의 지휘 아래 용골대와 마부태를 선봉장으로 해서 12만군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공해왔다. 그들은 진격로 주변의 성들을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한성으로 직행했다. 조정은 종묘의 신위와 빈궁, 왕자들만 먼저 강화도로 떠나게 하고 14일에는 국왕도 몽진을 결정했으나 이미 홍제원이 점령당해 강화로 가는 길이 차단당했다. 이에 남한산성으로 몽진, 장기항전에 돌입했었다. 당시 남한산성의 방어 능력은 병사 1 2천에 식량은 약 두 달치에 불과한 1 4 3백여 섬으로 적의 12만 대군과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적군은 남한산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고사작전을 택했다. 남한산성에 혹한으로 동사자가 늘어가자 국왕은 옷가지와 양피이불을 하사했고 뒤이어 백관들도 이불과 심지어 말안장 등속까지 거둬 성채와 군병들에게 나눠주었으나 동사하는 병사들과 백성의 수는 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음식조차 모자라 하루를 버티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행되어 갔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김상헌 중심의 척화파와 최명길 중심의 주화파 사이에 논쟁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강화가 함락됐고 세자가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대세는 주화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결국은 1637년에 3 9고두례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한 항복 의례로 한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는 것을 세 번 해야 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단 이 때 반드시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나야 한다.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해 인조는 사실상 수십번 머리를 부딪쳤고 이에 인조의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Topic

북벌정책은 과연 타당한 계획이었나?
조선 효종의 북벌 계획
조선 효종 때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이다. 병자호란이 치욕적인 항복으로 끝나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러한 민족적 굴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효종은 이완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여 비밀리에 군대를 훈련시키고 성을 고쳤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송준길 등을 등용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북벌론에 대한 비판
이이화는 효종의 북벌론을 허황된 꿈이라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효종은 국가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는 막중한 일을 추진하면서 국제정치의 역학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은 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만주 벌판을 달릴 허황된 꿈에 부풀어 있었다. 효종을 비롯해 일부 지배세력은 북벌 문제에 관한 한 거의 이성이 마비되었지만 민중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연암 박지원 역시 그의 위에 또 임금이 있다며 조롱했다. 명나라의 황제가 그의 임금이라는 것이다.

북벌론에 대한 새로운 주장
일부에서는 북벌정책이 진실로 군사력을 통한 청나라 정벌에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본뜻이 있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인조반정 후 조선은 명분론에 빠진 외교정책으로 인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신흥 강대국으로 이미 성장한 청나라와 승산 없는 전쟁을 치렀고, 결국 큰 피해를 입었다. 그렇기 때문에 효종의 북벌정책은 외교적 실패에 대항해 명분외교 및 명분적 사대주의의 연장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북벌정책이 왕의 친위군과 왕성 경비 군사력의 강화에만 그쳤던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효종의 북벌정책은 백성들을 긴장시키는 한편 그 관심을 밖으로 돌려, 전쟁 패배의 책임과 전쟁 후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정책인 것이다.

0665b07db3a420e5dc804d3b6c7eb022_1551965527_5914.jpg


 

Comments

  • 글이 없습니다.
  • 글이 없습니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