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대학입시 방식으로 논술시험의 원조격이다. "욕망은 무한한 것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철학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으로 오랜 역사와 수준 높은 문제로 이름이 높다. 바칼로레아는 단순히 보면 어렵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현실에서 한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를 제시한다. 우리 입시제도에 바칼로레아가 던지는 시사점은 없을까? 우리의 입시를 살펴보면 그 핵심은 뭐라 해도 자기주도학습과 수학능력 향상 그리고 사고력의 고양에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학생부가 강화되면서 세부특기사항과 창의체험활동, 그리고 각 과목별로 진행되는 수행평가 등이 중요해진 것이다. 'TODAY 바칼로레아' 는 프랑스 시민들이 사랑하는 철학적 사유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입시를 앞둔 수험생에게도 힘이 될 수 있는 컨텐츠라 할 수 있다.

1964년 2월 25일 미국, 무하마드 알리 세계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획득

최고관리자 0 547 03.07 22:34

무하마드 알리 세계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획득
알리는 1942 1 18일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12세때 조 마틴이라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경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복싱계에 입문, 1960년에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기까지 아마추어 108 8패라는 통산 전적을 남겼다. 1960 10 29, 6라운드 판정승으로 프로 데뷔를 장식한 뒤, 안젤로 던디와 트레이너 계약을 체결하고 그의 지도하에 급속히 독특한 복싱 스타일을 확립해간다. 62 11, 49세의 아티 무어를 누르고 19연승 가도를 달리던 헤비급 챔피언 소니 리스톤의 도전권을 획득한 뒤, 1964 2 25일 리스턴을 KO로 물리치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그러나 챔피언 벨트를 따낸 후, 곧바로 이슬람교로 개종했음을 확인시켜 미국 언론에 화제가 되었으며, 흑인 이슬람교도로서 흑인해방 운동에 노력하였다. 그 후 9차례의 방어전을 지켰지만, 1967년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베트남전 징병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타이틀을 박탈당하였다.

하지만 1971년에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아 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이미 왕년의 기세는 꺾여있었다. 당시의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저와의 대전에서 15라운드 판정패를 당한 것. 다시 설욕을 다짐하며 2년의 세월을 보낸 알리는 2라운드 만에 프레이저를 KO시킨 조지 포먼과 맞붙게 된다. 한편, 포먼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40연승의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는 엄청난 파괴력의 소유자. 언론도, 관중도 포먼의 압도적인 승리를 장담했다. 1974 10 30, 경기장에 모여든 열광적인 관객과 전세계 10억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알리와 조지 포먼의 대전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그리고 알리는 가장 드라마틱하게 재기전을 펼치며 자신의 위대성을 증명했다. 아무도 꺽을 수 없다던 24세의 무적의 조지 포먼을 KO로 눕히고, 10년 전 부당하게 빼앗긴 벨트를 되찾게 된 것이다.

알리는 1978 2 15일에 레온 스핑크스에게 패하였으나, 그 해 9월의 리턴 매치에서 승리하여, 헤비급 역사상 처음으로 타이틀 획득 3회의 위업을 실현하였다. 1981년 은퇴까지 그의 전적은 61 56 5 37 KO. 알리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최종 성화 주자였다. 파킨스병을 앓고 있는 그의 안타까운 모습에 세계가 박수를 보냈다.


Topic

스포츠와 정치와 종교와 인종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예외는 있었지만 서구 사회 대부분 국가들은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대체로 국제 대회에서 거두는 성적에 그다지 큰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전체주의나 공산주의 국가는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하나의 정치적 선전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고, 이 같은 스포츠의 정치화는 제3세계 국가들은 물론 서구 사회에도 확산됐다.

파시즘과 나치즘-강렬한 스포츠 국가주의
근대 스포츠가 국제화하면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스포츠 국가주의는 앞서 살펴본 대로 올림픽과 월드컵의 인기를 지탱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다. 민족주의 정서가 배어 있지 않는 국제 대회란 어떻게 보면 그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시즘과 나치즘의 등장은 단순한 스포츠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1920∼1930년대 꽃을 피운 파시즘과 나치즘은 그들의 정치적 이념을 위해 스포츠 국가주의를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갔으며, 국제 스포츠의 지형을 완벽하게 국가 간 대립 양상으로 치닫게 하는 도화선이 됐다. 그들에게 스포츠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1930년대 스포츠와 강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미래를 향한 국민적 대단결로 귀결될 수 있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강한 체력이 필요했다. 이런 배경에서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은 이후 체육 활동을 강조했다. 더 이상 이탈리아의 스포츠는 순수한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활동이 아니라 국가 발전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됐다. 특히 이탈리아는 젊은이들의 체육 활동을 증진하기 위해 대학교 체육에 엄청난 투자를 했고 이들은 국제 대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탈리아 파시즘이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만들어 낸 최고의 성과는 1934년과 1938년 월드컵 우승이었다. 이미 무솔리니가 집권하기 전부터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을 받았던 이탈리아 축구는 파시즘의 광풍 속에서 월드컵 우승으로 완벽하게 이탈리아의 중요한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축구의 월드컵 우승은 하나의 이정표였으며 파시스트 당원들의 절대적 성원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논란거리가 있었다. 바로오리운디에 대한 문제였다. 오리운디는 이탈리아에서 남미로 이민을 갔던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산업화가 더디게 진행돼 여전히 농촌 사회였던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주로 경제적 이유로 1914년까지 500~600만 명이 남미로 떠났다. 이들 가운데는 주로 아르헨티나에서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린 이탈리아 혈통 이민자들이 꽤 있었다. 전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탈리아는 이 선수들의 이중국적을 허용했고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에 오리운디의 역할이 컸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탈리아 국민으로서 그들의 애국심을 의심받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축구 협회와 무솔리니 정권은 이탈리아에 대한 애국심이 있다면 오리운디가 대표팀에서 뛰는 것도 무방하다는 실용주의를 택했다. 비록 일부 오리운디들은 남미에서 터득한 개인 드리블에 너무 탐닉한 나머지 팀 전체에 해가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나치즘도 파시즘과 비슷한 방향에서 국가 스포츠 진흥 정책을 폈다. 특히 나치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대에서 체육 활동을 적극 권장했다. 또한 미래의 나치 전사를 키워야 하는 건강한 엄마를 육성하기 위해 여성들의 체육 활동도 강조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독일 여자 선수들이 무려 45개의 메달을 거머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무솔리니와 달랐다. 히틀러의 내면세계는 스포츠맨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으며 대체로 영국에서 태동한 근대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 때문에 1936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베를린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히틀러가 국가 지도자로 선출되자 올림픽 개최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모든 국가 역량을 쏟아 붓겠다는 약속을 했다.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이처럼 좋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개최에 대한 반대 여론은 나치가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외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을 차별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치 정권은 나치 스포츠 기관에서 모든 독일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IOC 내부에서도 유대인을 차별하는 독일의 베를린올림픽 개최에 의문을 제기했다. 모든 국민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올림픽의 이념과 상반됐기 때문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나치 정권은 한시적으로 유대인 차별 정책을 완화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공공 체육 시설을 사용하게 허락했지만 여전히 스포츠 클럽 활동은 제한했다. 스포츠 클럽이 독일 스포츠의 근간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체육 활동에는 제약이 많이 따랐다. 또한 당시 유대인 스포츠 기관은 나치 스포츠 기관에 포함되지 않은 채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를 두고 나치 정권은 유대인 스포츠는 분리돼 있을 뿐 차별을 받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어쨌든 나치 정권은 IOC에 유대인 선수도 독일 대표팀의 일원으로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서한을 보내며 IOC의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이런 약속이 담긴 서한의 내용은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도 몰랐으며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 유대인 사회에서 베를린올림픽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지만 IOC 위원이 되기 위해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아마추어체육협회(AAU) 회장 에이브리 브런디지는 미국 내 베를린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유대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음모로 보고 있었다. 그는 이들의 이런 음모가 정치적 술수와 연관돼 있다고 비난하며 스포츠는 정치와 분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국의 베를린 올림픽 보이콧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더욱이 IOC에는 베를린 올림픽은 좀 더 좋은 국제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올림픽과 나치의 이념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부각시켰다. 두 이념은 모두 육체적으로 완벽한 남성을 찬양하는 가치 체계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미국이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IOC도 이런 공로를 인정해 베를린올림픽이 끝난 뒤 IOC 위원으로 임명했다. 나치 정권의 선전을 위한 정치 도구로 전락한 베를린올림픽은 이처럼 극심한 논란과 어려운 국제 관계를 뚫고 치러지게 됐다. 베를린올림픽은 유대인 차별을 비롯해 올림픽의 정치화라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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