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대학입시 방식으로 논술시험의 원조격이다. "욕망은 무한한 것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철학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으로 오랜 역사와 수준 높은 문제로 이름이 높다. 바칼로레아는 단순히 보면 어렵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현실에서 한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를 제시한다. 우리 입시제도에 바칼로레아가 던지는 시사점은 없을까? 우리의 입시를 살펴보면 그 핵심은 뭐라 해도 자기주도학습과 수학능력 향상 그리고 사고력의 고양에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학생부가 강화되면서 세부특기사항과 창의체험활동, 그리고 각 과목별로 진행되는 수행평가 등이 중요해진 것이다. 'TODAY 바칼로레아' 는 프랑스 시민들이 사랑하는 철학적 사유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입시를 앞둔 수험생에게도 힘이 될 수 있는 컨텐츠라 할 수 있다.

1947년 2월 28일 대만 2.28 사건

최고관리자 0 556 03.07 22:36

 

2.28사건
대만은 50년 간의 일제통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중국 국민당이 대만을 통치하면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중국 내륙에서 공산당과 국공내전에 투입될 물자의 상당한 부분을 대만에서 공수하면서 대만에는 물자부족사태가 일어났다. 이 때문에 물가가 치솟자 민생은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민중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세력들이 대만으로 건너와 주요 요직을 모두 차지하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대만의 토착민은 배제되고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국민당 세력들이 일제가 차지했던 모든 기득권을 가져가 버리자 내성인들의 반발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대만에서는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을 외성인이라고 부르고 대만에서 토착민을 본성인 또는 내성인이라고 불렀다. 출신이 다른 내성인과 외성인의 갈등은 점차 첨예화되어 갔다. 특히 50년 간 일본의 지배 속에서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대만인에게 모멸과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에 반해 외성인은 고급 관리직을 대부분 점유하면서도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당시 담배는 정부의 전매사업 품목이었는데 정부의 허가없이 담배를 판매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1947 2 27일 타이베이에서 밀수 담배를 판매하던 노인이 단속 공무원에게 잡혔는데 그 과정에서 단속원이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노인의 머리를 심하게 가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지나친 단속에 항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단속원이 총을 발포하여 무고한 시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인 2 28일 분노한 군중들이 관청으로 몰려가 해당 공무원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타이완 경찰은 오히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에 나서자 시민들은 경찰서를 습격하였고 구타당한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군과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시위대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정부군과 전면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2 28일 타이베이에서 일어난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시위는 대만 언론의 자유와 담배를 국가가 판매하는 것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나아가 대만의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등 32개 조항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중국 본토에서 증파된 국민당군은 대만에 상륙하여 시위대의 요구를 묵살하고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시위 주동자를 색출하여 체포하였고 많은 시민들이 살해되었는데 10일 동안 유혈진압이 진행되면서 약 3만 명이 죽었다. 이때의 진압으로 대만 전체는 대혼란에 빠졌으며 오히려 장제스는 2·28사건의 주도했던 인사들을 무차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5월 중순이 되어서야 유혈진압은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고 16일에 진압이 종결되었다. 국민당은 언론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2·28사건은 언급되지 못했고 숨겨진 사건이 되었으며 이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 되었다. 중국 본토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주해 옮겨왔으며 본성인에 대한 이들의 차별과 탄압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본성인은 공산당과 친일파로 몰려 체포되었고 이때 발포된 계엄령은 38년간 계속되었고 1987 7 15일에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2·28사건은 수만 명의 시민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사건으로 대만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1988년 중화민국 정부 리덩후이 총통이 2·28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하였고 당시 사망하였던 시민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공원이 세워졌다.


Topic

중국인과 대만인은 하나로 볼 수 있는가? 그들의 역사적 갈등에 비추어 한반도 구성원의 민족의식은 어느 단계에 있을까?
중국의 '하나의 중국' 수용 압박에도 대만인 4명중 3명은 대만은 중국과는 별개로 두 국가가 공존하는 형태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7
6 20일 대만 자유시보등에 따르면 싱크탱크 신대만 국책연구소가 17∼18일 성인 남녀 953명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5.0%가 양안(중국과 대만)을 두 국가로 여긴다고 답했다.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국가라는 대답은 14.2%에 불과했다. 이는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 수용 압박에도, 대만인들의 독립 지향이 강해진다는 조사결과여서 주목된다고 매체들은 전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최근 파나마가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대만과 단교한 직후 실시됐다. 아울러 조사대상의 75.8% '대만' 명의로 유엔 가입을 지지했고, 88.2%는 대만이 정상적인 국가가 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중국이 양안 평화와 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는 대답도 46.3%로 집계됐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추구하는 현상유지 정책 지지는 65.4%, 중국과 현상유지가 안 되면 독립해야 한다는 대답은 54.8%로 조사됐다. 설문에서 80.1%가 자신을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으로 여겼으며, 정체성이 중국인이라는 응답은 12.9%였다.


0665b07db3a420e5dc804d3b6c7eb022_1551965785_8272.jpg


 

Comments

  • 글이 없습니다.
  • 글이 없습니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