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한국사회를 강타한 ‘뇌섹’은 새로운 미적 기준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뇌가 섹시하다는 말의 줄임으로 겉모습과 별개로 똑똑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뇌섹남녀의 기본조건은 논리력이다. 시대는 변하지만 논리는 변하지 않는다. 논리학은 논증에서 사용되는 명제를 연구하여 그 명제가 논증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연구하는, 듣기만 해도 딱딱한 학문이다. [뇌•섹•男•女]가 제공하려는 것은 논리학의 딱딱함과 100% 일치하지는 않는다. 단지 생각에 생각을 더해 논리적인 사고를 해보자는 목표를 가질 뿐이다. 미국에서 학력저하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90년대에 제시된 비판적 사고 역시 논리적 사고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하는 사회라면 더더욱 현실을 헤쳐나가는 도구로 논리가 필요하다. [뇌•섹•男•女]는 이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걸어서 교과서속으로> 38. 소쇄원-죽녹원

최고관리자 0 687 2018.07.26 23:59

한국의 민간정원 중에서 최고라는 칭송을 받는 소쇄원은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오늘까지도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왜 소쇄원의 정겨운 모습을 사랑하고 아끼며 또 어루만져주고 싶은가? 소쇄원은 누가, 언제, 왜 어떻게 조성하였으며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또 소쇄원은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하여야 하며, 중국·일본의 정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전남 담양에 위치한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 1530년경에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영한 별서(別墅)원림이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으로, 주된 일상을 위한 저택에서 떨어져 산수가 빼어난 장소에 지어진 별저(別邸)를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원림(園林)이란 정원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과 우리나라에선 원림을, 일본에서는 정원을 주로 선호한다. 정원이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하여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에서 동산과 숲의 자연스런 상태를 그대로 조경대상으로 삼아 적절한 위치에 인공적인 조경을 삼가면서 더불어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소쇄원을 조영한 양산보는 15세에 왕도정치를 표방하고 개혁을 추진했던 정암 조광조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화순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큰 충격을 받아 현세적인 벼슬길의 무상함을 깨닫고 고향에 은둔하게 되었다. 이것이 양산보가 17세의 나이에 창암촌 계곡의 자연 속에 소쇄원을 꾸미게 된 계기였다. 당시의 왕이었던 중종은 연산군 시대의 악정(惡政)을 개혁하였으며,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중용하여 그들이 표방하는 왕도정치를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개혁이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조급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훈구파, 즉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이는 결국 기묘사화를 불러일으켜 신진사류들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소쇄원은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풍광을 관상하며 여유를 즐긴 장소요, 이상을 토로하던 문화 담론의 산실이었다. 김인후를 비롯하여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곳을 드나들며 사유와 만남의 지평을 넓혔다.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는 수양과 학문뿐 아니라 풍류와 사귐을 통한 선비문화의 형성 또한 중요한 일이었으니 그를 위한 장소인 정자나 별서를 경영하는 일은 곧 그들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산물이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서 무등산 원효계곡에는 소쇄원을 비롯하여 식영정, 환벽당, 독수정 등의 정자원림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소쇄원은 주거기능을 갖춘 별서로서 한국 최고의 별서원림이라 할 것이다. 양산보로부터 3대에 걸쳐 조영된 소쇄원의 예전 모습은 송시열이 그린 그림을 1755년에 판각(板刻)한 〈소쇄원도〉(瀟灑園圖)가 있어 짐작할 수 있었으나 목판 자체는 안타깝게 분실되고 말았다. 특히 이 목판화에는 양산보의 사돈인 김인후가 1548년 당시 소쇄원을 보고 쓴 48수의 시제가 새겨져 있으니 이를 〈소쇄원 48영〉이라 한다.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은 소쇄원의 건축적 구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각 공간에서 일어난 행위와 감상까지 생생히 전해준다. 시에 나타난 정원의 모습과 이미지는 그 자체를 건축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정도이다. 이 시는 소쇄원의 계획 개념을 핵심적으로 간파한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대숲의 바람과 소쩍새 울음, 엷은 그늘과 밝은 달, 그리고 취중에 나오는 시와 노래다. 청각적인 소리, 시각적인 빛과 그늘의 대조, 그리고 관람자의 문학적인 감수성으로 소쇄원의 진가를 포착한 것이다. 소쇄원은 이렇듯 시각적 차원을 넘어선 청각적인 정원이며 궁극적으로 시적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적인 정원이다.

소쇄원은 건물이나 나무, 계곡을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에서 끝나는 공간이 아니다. 출렁이는 나뭇가지,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떨어져 구르는 낙엽,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가득한 푸르름, 속삭이듯 빛나는 햇빛 등을 비롯하여 자연 속에 녹아나는 한적함과 넉넉함, 이러한 아름다움은 결코 하나 둘에 한정되거나 끝나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시인묵객들이 드나들었던 소쇄원은 눈으로 감상하는 시각적 차원을 넘어선 청각적인 정원이며 궁극적으로 시적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적인 정원이다. 자연의 기운과 인간의 마음이 하나로 합치하는 곳, 그곳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청각과 음영의 효과…. 이제는 우리도 문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소쇄원의 원림과 건축적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2015학년도 10월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
15. 교사의 질문에 대한 학생의 답변으로 적절한 것은?

6조 직계제를 도입하였습니다.
현량과의 시행에 반대하였습니다.
기묘사화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혁명파 사대부의 학풍을 계승하였습니다.
중앙 집권과 부국강병을 강조하였습니다.
 
 
정답 및 해설
15. 정답 ③ [출제의도] 조광조의 개혁 정치를 파악한다. 자료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중종 때의 조광조이다. 조광조는 훈구 세력의 반발로 일어난 기묘사화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소쇄원 - 한국의 명원 (위대한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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